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가사와라 제도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서기 전후시기에 기타이오 섬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있었고, 이들은 마리아나 제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지만, 유럽인들이 방문했을 때는 대가 끊긴지 오래였다. [[유럽인]]들이 이 섬을 처음 방문한 것은 [[1543년]] 10월 2일, [[스페인 제국|스페인]] [[탐험가]] 산후안 섬의 베르나르도 데 라 토레(Bernardo de la Torre)가 그가 포파나(Forfana)로 그린 하하지마(Haha-jima)를 보았을 때였다. 당시, 그 섬들은 [[사람]]이 살지 않았다. 일본의 경우 [[1593년]] [[센고쿠 시대]] 마츠모토(松本) 영지의 [[사무라이|무가 세력]]이었던 오가사와라 사다요리(小笠原定頼)라는 [[다이묘]]가 최초로 발견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역사적 자료는 부재하며 실질적으로 일본의 섬 발견은 [[1670년]]에 이루어졌다. [[1675년]] [[에도 막부|막부]] 원정대가 섬을 탐사한 뒤 "[[무인도]]"로 명명했다. 막부의 명령에 따라 탐험가 시마야 이치자에몬은 여러 종의 [[나무]]와 [[새]]를 발견했지만, 그의 탐험 이후 막부는 외딴 섬들을 개발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. 막부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일본령으로 공표했으나 거리 문제로 인해 섬들을 관리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했다. [[1827년]] [[HMS]] Blossom 호의 선장 비체이(Beechey) [[대위]]는 이 군도에 도달했고 섬을 [[대영제국|영국]]의 소유물이라고 선언했다. 선박의 선체에서 동판을 떼어낸 후, 아래와 같은 주장을 나타내는 표시로 해변에 남겨두었다. "Blossom 호의 선장인 F. W. Beechey 대위는 1827년 6월 14일 [[영국 국왕]] [[조지 4세]]를 대신하여 이 군도를 소유했습니다." 이 지역에 최초로 [[주민]]이 거주하게 된 것은 [[1830년]]으로, [[미국인]] 5명과 [[하와이 원주민]] 등의 [[폴리네시아인]] 20명이 거주하여 [[포경선]] 등 [[원양어선]]의 중간[[보급]] 기지의 형태로 유지한 것이 시작이다. [[1846년]] 더 많은 정착민들이 포경선 하워드호를 타고 도착했다. 이들 유럽계, 폴리네시아계의 후손은 구미계도인(欧米系島民)이라고 볼려지며 남아있다. [[1862년]] 1월, 일본 [[에도 막부]]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재정복한 후 섬을 [[식민지|식민지화]]했지만 이듬해인 [[1863년]] [[열강]]들의 견제로 오가사와라 제도 섬을 에도 막부의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을 중단했다. [[메이지 유신]] 이후인 [[1875년]] [[일본 정부]]는 [[일본군|군인들]]을 보내 다시 오가사와라 제도를 개간했고 이듬해인 [[1876년]] [[하치조지마]]에서 정착민 38명을 파견하였다. 또한 같은 해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[[내무성]]의 관할지역이 되었고 이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미국, 영국에 통고해 이를 인정받음으로써 오가사와라 제도는 공식적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. [[1880년]]에 [[도쿄부]](東京府)에 편입되었다. 이에 기존에 섬에 거주하던 [[서양]] 및 [[오세아니아]] 계통 [[원주민]]들은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[[1882년]]에 강제로 [[일본인|일본 국적]]을 부여받아야 했고, 결국 전원 일본으로 귀화하여 일본인이 되었다. [[참치]]와 [[다랑어]] 등의 [[어업]]과 [[열대과일]]의 생산 등을 통해 최대 7,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거점지로 성장하고 있었으나, [[제2차 세계 대전]] 중인 1944년에 군인 및 관계자를 제외한 6,886명의 도민을 강제로 일본 본토로 이주시킨 후, 제도 전체를 군사기지로 사용하며 [[이오지마 전투]] 등의 무대가 되었다. 전쟁 도중 치치지마에서는 [[치치지마섬 식인 사건]]이 발생했다. 종전 후 미군의 보호령으로 편입되었고 [[미국 해군]]은 원래 정착민으로부터 후손이거나 결혼에 의해 그들과 관련된 거주민들을 제외한 모든 거주민들을 추방했으며, 전쟁 전 [[백인]]이나 [[미크로네시아인]], [[폴리네시아인]] 등의 후손들의 귀환을 허용했다. 이들 구미계도인들은 [[제2차 세계 대전]] 당시에 도쿄도 [[네리마구]]로 강제로 이주당한 후 그곳의 공장에서 일했는데, 그곳에서는 이국적인 외모로 인해서 차별을 당했지만, [[미군]]과의 트러블은 별로 없어서 [[오키나와]]와 달리 미군 통치에 대해서 만족했다. [[1968년]]에 다시 [[일본]]으로 반환되면서 이전에 거주하고 있었던 일본인의 재정착이 허용되고, [[1979년]]에 [[오가사와라무라]]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. [[2013년]] 11월, 니시노시마 앞바다에 새로운 [[화산섬]]이 형성되어 니시노시마 섬과 합쳐져 규모가 커졌다. [[2021년]] 8월, 니시노시마 인근에 [[화산]] [[분화]]로 후쿠도쿠오카노바(福徳ノ場)라는 [[소괄호]] 형태의 [[섬]]이 만들어졌는데 워낙 가벼운 돌로 구성된 섬이라 [[파도]] 등으로 인해 한 쪽은 소멸, 남은 한 쪽도 작아지고 있다. 니시노시마는 [[토양]] 성분이 달라 작아지지 않는 것과 다른 점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